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토니오 살리에리 (문단 편집) ==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 오늘날 살리에리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작품 때문이 아니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의 갈등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35살에 요절한 직후부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시기하고 그의 사망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후 모차르트의 유명세가 점점 오르면서 모차르트와 관련된 일화가 퍼지는 과정에서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이 그게 정설인마냥 퍼져나가고 여기에 살점이 더 붙어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곡을 베꼈다.'라거나 '모차르트는 살리에리에게 독살당했다.'같은 억울한 '''누명'''들이 붙었다.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1830년에 쓴 [[아마데우스(희곡)|모차르트와 살리에리]]라는 희곡에서도 같은 내용이 다뤄지는데, 이후 이 독살설은 특별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심지어 이런 이미지는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후술되는 창작 항목을 보면 살리에리는 항상 모차르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그의 재능을 질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애초에 음악계 전체에서 그와 친했던 사람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사회성이 낮은 인물이었고, 반대로 살리에리는 재능, 부, 명예, 인간관계를 모두 갖춘 인물로서 모차르트를 질투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모차르트의 개차반스러운 인성, 특히 친한 사람들한테는 다정했지만 대체로 경박하고 짓궂은 농담을 즐기는 그 특유의 가벼운 성격을 살리에리가 마땅치 않아했기 때문이며,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훼방놓았다는 썰 등은 모두 모차르트의 망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리에리가 지적되는 건 그가 모차르트의 스승이었으며 유명인이었고 큰손이라는 위치인 점이 컸다. 그리고 천재의 이른 죽음과 이에 관련된 살리에리의 루머, 이를 바탕으로 창작된 여러 창작물들 때문에 이러한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모차르트는 가는 곳마다 소동을 일으키는 사고뭉치였고, 이 때문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있었다.[* 실제로 모차르트가 프리랜서 음악가의 시초이기는 했다. 온전히 자의로 프리랜서의 길을 택했다고 하기는 뭣하고 그 개차반 성격 때문에 반쯤은 쫓겨난 거긴 하지만. 어쨌든 모차르트라는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후배이자 모차르트 이상으로 누구 밑에서 고분고분 일할 성깔이 아니었던(...) 베토벤은 스스로 프리랜서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빈에 오기 전 잘츠부르크에서는 터무니없는 연봉[* 다른 궁정 음악가는 2,000굴덴이나 받는데 난 800굴덴밖에 안 주냐... 라며 대놓고 투덜거린적도 있었다. '''전임 음악가가 수십 년 일해서 오른 연봉'''을 초봉으로 달라하니 궁정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 애초에 그 800굴덴도 그 당시 상위 공무원이나 받는 연봉으로 상당한 고액이었다.]을 요구했으며, 궁정 음악가면서도 대주교 히에로디무스 폰 콜로레도에게 대놓고 개긴 뒤 스스로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빈에 정착한 후로도, 전임 황제가 잘 대해줬으나 그걸 자랑하듯 잘난척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고, 황실에서 직접 내린 작곡 요구 또한 건성으로 받아들이는 등 사람들이 싫어할 짓만 골라서 했다.[*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로, 오스트리아 황궁의 궁내상서가 모차르트에게 직접 와서 "자네 그 성격 때문에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그러니까 제발 그놈의 성격 좀 고치게"라고 '''조언'''을 했는데 모차르트는 "고칠 게 뭐가 있습니까?!"라고 코웃음치고 떠났다. 이 궁내상서라는 직책은 알기 쉽게 말하면 '''궁궐을 담당하는 장관, 현대 한국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장쯤은 되는 급'''인데다 나이로만 따져봐도 그 궁내상서가 모차르트보다 최소 30살은 연상이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눈치없고 인성에 크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허구한 날 위아래 없이 깽판을 치고 다니니 주군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했던 살리에리 같은 궁정 음악가들에게 모차르트는 당연히 부담스럽고 거슬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살리에리는 당대에 여러 왕을 모시면서 한 번도 잘리지 않고 궁정악장으로 재직할만큼 큰 성공을 거뒀고, 가난한 후배들을 무료로 가르치거나 음악가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도 여는 등 대인배적인 행동으로 빈 음악계의 실세 노릇을 하던 인물이었다. 심지어 모차르트의 제자나 아들도 그를 거쳐갔을 정도다. 물론 유행이 바뀌어 모차르트의 음악이 인기를 끌고, 자신의 음악은 유행에 뒤쳐진 곡으로 취급되면서 음악가로서 좀 섭섭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살리에리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인품과 실력으로 사회적으로 존경과 명예를 누리고 있었으며, 1790년에서 1800년 즈음엔 이미 '''자신의 곡이 유행에서 밀린다는걸 알고 일선에서 스스로 물러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오히려 [[박수칠 때 떠나라]]를 실천한 인물로 자신이 위치를 냉철하게 판단하고 옛날사람인걸 인지하고 순순히 빠져나간 그런 사람이 개차반인 성격에 생활 안정조차 유지 못하고 제명에도 못죽은 모차르트를 시기할만큼 그릇이 작은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모차르트가 살아있을때 쓴 편지들을 보면 역으로 모차르트는 잘나가는 살리에리를 질투하며 중상모략을 펼친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다수다. 일례로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보면 황제에게 총애받는 살리에리가 자기를 모함해서 못나간다거나 오페라로 살리에리를 이기겠다는 식의 살리에리를 의식하고 질투한 기록들이 상당수 많이 보이며 살리에르를 사기꾼이라 지창하며 원색적으로 비난한 기록도 많다. 물론 살리에리를 비롯한 다른 작곡가들이 모차르트를 싫어한건 맞지만, 모차르트의 능력을 질투하고 [[마타도어]]를 해서 음악활동에 지장을 받았다거나 돈을 제대로 벌지 못했다는 주장도 분명히 사실과 다르다. '''모차르트가 항상 쪼들렸던 건, 그가 경제 관념이 부족하고 낭비벽이 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성질도 괴팍하고 독선적이고 경박해서 황실 음악가 동료들이 싫어했던것이다.''' 거기에 후원자인 황실과 충돌하면서 들어오는 수입은 적었으며 모차르트가 일찍 사망한 것도 큰 씀씀이를 만회하기 위해 건강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게 작곡에 매달렸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독살설 또한 마찬가지로 루머다. 베토벤의 제자이자 작곡가였던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1794~1870)[* [[멘델스존]]의 스승이기도 하다.]가 1823년 11월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한 살리에리를 찾아가서 인터뷰했는데, 이때 살리에리는 독살설을 분명히 부인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암살 루머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인터뷰를 여러 번 거절당했고 나중에는 담당 의사가 흥분시키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전제로 허락했다고 한다. >나는 분명히 그를 싫어했네. 그리고 지금도 그가 싫어. 그러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나만 그를 싫어했던 것은 아닐세. 그리고 내 뜻으로 그를 죽게 만든 건 더더욱 아니고. 그를 죽였다는 오명은 나에게 전혀 반갑지가 않아. 모셸레스의 이 말을 들은 베토벤은 자신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사람 모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살리에리의 말은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성격을 고려하면 베토벤의 말은 '모차르트 선생님도 내게는 스승이니 함부로 말하긴 그렇지만 그분 성격이 좀 모난 건 맞았지. 그리고 살리에리 선생님은 그럴 분이 아니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후 [[치매]]가 점점 심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https://www.smh.com.au/entertainment/opera/did-salieri-really-kill-mozart-20140612-zs2t4.html|내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라고 외치며 병원 내를 몇 번 돌아다녔는데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한 이 발언이 살리에리의 모차르트 독살설에 큰 기여를 해버렸다. 본의 아니게 불에 기름을 부어버린 꼴. 물론 어차피 치매 상태에서 한 말이라 깊이 들어갈 필요는 적지만, 굳이 해석하자면 위에 언급했듯이 이미 생전부터 살리에리는 이 독살설 때문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으므로 치매로 인해 정신이 흐려진 상태에서 이를 잘못 말했을 가능성이 있다.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살리에리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서 정신병원에 갇힌 채 폐인이 된 것도 사실이 아니다. 앞서 말한 치매로 인해 요양원 신세를 진 적은 있지만 음악가로서의 명예와 지위는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시신을 검사한 의사 또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자 도리어 불쾌해하며 "아니 그럼 내가 틀렸단 말야? 모차르트는 틀림없는 자연사다. '''그의 시체에 독살의 흔적은 없었다고'''!"라며 반문했다고 한다. 현재 모차르트의 시신이 [[행방불명]] 상태이기 때문에 그 당시 의사가 얼마나 제대로 진단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모차르트의 시신에서 이상한 흔적이 있었다면 의사가 그 사실을 숨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실제로 사이가 안 좋기는 했다. 음악학자들은 두 사람의 갈등이 모차르트가 빈에 온 직후인 1781년에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두 음악가는 당시 14살이었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엘리자베트 공녀(Princess Elisabeth of Württemberg)의 음악교사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는데, 결국 교사 자리를 차지한 것은 살리에리였다. 또 모차르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황제 [[요제프 2세]]가 죽은 후 후임으로 [[레오폴트 2세]]가 황제가 되었는데, 이 신임 황제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비롯한 궁정음악가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레오폴트 2세에게 추천해 주지 않은 탓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모차르트는 자주 편지에서나 구두로 '''"자신이 빈에서 출세하지 못하는 건 살리에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사회 생활처럼 같은 분야에서 서로 비난하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력하기도 했던, 좀더 복잡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차르트가 빈에서 자리를 잡고 작곡가로 성공을 거둔 후부터는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곤 했다는 증거'''만''' 많다. 살리에리는 1788년 궁정악장이 된 직후 황제 요제프 2세 앞에서 자신의 오페라 대신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지휘했으며, 1790년 레오폴트 2세 황제의 취임식에서 모차르트가 작곡한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기도 했다. 특히 1791년 10월 14일 모차르트가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보면, 살리에리와 함께 마술 피리를 관람했는데[* 이 때 모차르트, 살리에리와 함께 동석한 사람이 바로 소프라노 카테리나 카발리에리.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짝사랑했던 제자지만 결국 모차르트의 [[후궁으로의 도피|화려한 공연]]에 출연하여 살리에리를 분노케 한 그 소프라노이다. 실제 역사에서 카발리에리는 모차르트와 사적으로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살리에리와 꾸준히 얽혀있었다. 대본가인 다 폰테가 둘의 관계를 레오폴드 2세 앞에서 폭로하는 암투가 벌어질 정도.] 살리에리가 "이것이 진정한 오페라다, 앞으로 계속 보러 와야겠다" 등등의 민망할 정도의 격찬을 했고 브라보를 외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는 것을 흐뭇하게 적었다. 또한 두 사람이 합작해서 작품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었는데, 악보가 발견되지 않아서 한동안 소문에 머물러 있다가 2015년 11월에는 드디어 두 사람이 공동으로 작곡한 곡의 악보가 프라하에서 발견되었으며 2016년 2월 [[http://www.bbc.com/news/world-europe-35589422|연주회가 열렸다.]] 전술한 것처럼 살리에리는 모차르트 사후 그의 아들이었던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를 가르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인간적으로 좋아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도 인정했지만, 협력을 거부할 정도로 싫어했던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음악가로서는 분명히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정도가 가장 사실에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모차르트야말로 입지 든든하고 사회성 원만한 살리에리에게 내심 부러움이 있어서 내가 성공 못하는 건 살리에리 때문이라고 탓했던 것일지도. 어쨌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지독히도 싫어했고 그의 재능에 열등감을 품었다는 소문 때문에 오늘날 의학계에서도 '타인에 대해 지나친 열등감을 갖고 시기, 질투하는 심리'를 [[살리에리 증후군]]으로 부르고 있다. 이 소문 때문에 당대에는 인기 작곡가였지만 불세출의 작곡가로 남지는 못했던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와 함께 그 이름이 길이 남게 되었긴 하다지만, 위에서도 살리에리가 자기 입으로 "그를 죽였다는 오명은 내게 반갑지가 않다"라고 한 걸 보면 살리에리 본인 입장에선 그리 달갑진 않을 듯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